곽지리 동산
|
|
|
|
곽지리 동산 소개
|
|
|
곽지리 동산
물이 차가워 시원한 여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곽지 해수욕장.
이 해수욕장 동쪽에 동산이 있는데, 옛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는데, 해수욕도 즐기고, 동산에 올라 전설을 되새겨보는 것도 재미있는 체험이 될 듯 싶다.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고 있을때, 8년이나 거듭되는 내란과 외환으로 당태자는 다른 곳으로 피난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기로 하였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번지더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신하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당태자만이라도 무사히 피난을 가야 훗날 다시 일어설 기약을 할 수 있는데 그것 마저 물거품이 된다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조차 없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냥 배를 타고 떠나기로 하엿는데, 당태자를 태운 배는 보름동안 바다를 정처없이 떠돌다 겨우 곽지 해수욕장 부근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당태자는 허기에 지친 나머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당태자 부인. 당태자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목숨을 건져 모래사장을 기어 올라오는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된 당태자 부인은 마을 사람들의 정성스런 간호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죽은 당태자를 묻고 무덤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날이후 당태자부인은 당태자의 무덤을 매일 드나들며 슬피 울었다.
당태자의 눈물은 흘러 길을 메웠고 천근 만근 무거운 발걸음은 자갈을 부셔 모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니, 그 당시 당태자의 애끊는 모습이 얼마나 가련했는지 안보아도 짐작이 될 정도이다.
그 부인은 남편이 묻힌 동산을 넘을 때마다 울었다 하여 '늘 울며 다니는 동산'이란 뜻에서 그 동산을 '늘우시동산'이라 불렀다.
이렇게 슬픔에 쌓여 지내던 당태자 부인은 결국 남편을 따라 죽고 말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부인의 길을 조금이라도 편히 가라는 뜻에서 “대비인동산”이라는 이름을 지어 , 그 부인의 일편단심 높은 절개를 기렸는데, 지금도 곽지해수욕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당태자 부인이 타고 온 배가 파선당한 곳인 곽지 해수욕장 부근 코지를 '당파선코지'라 불렀다. 당파선이란 당나라의 배가 부서졌다는 뜻이요, 코지란 뾰족히 드러난 곳의 을 이름을 뜻한다.
지금도 곽지리 해수욕장 동쪽에는 이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당태자라는 직위는 그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높은 지위였기에 비록 배는 부서져 당태자는 죽었어도 그의 무덤만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여 전포(앞개)에 다시 묻어 '당능'이라 이름지어 관리를 했다 한다.
|
|
|
|
|
|
|
|
|
|